서울 아파트 전월세 시장에서 세입자가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하지 않고 집주인과 임대료 등 조건을 다시 협의해 계약을 연장하는 ‘합의 갱신’이 증가하고 있다.
8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 자료에 따르면 지난 8월 신고된 서울 아파트 전월세 계약은 1만3411건으로, 이 가운데 갱신계약은 6956건이었다. 전체의 51.9%다.
올해 서울 아파트 전월세 계약에서 갱신계약 비중이 50%를 넘어선 것은 처음이다.
월별 갱신계약 비중을 보면 1월 44.2%, 2월 45.9%, 3월 45.2%, 4월 41.8%, 5월 45.9%, 6월 44.6%, 7월 46.6%로 줄곧 40%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8월 들어 절반을 넘어섰다.
갱신 10건 중 6건은 ‘합의 갱신’
눈에 띄는 부분은 계약갱신청구권 사용 비중이 오히려 낮아졌다는 점이다.
8월 갱신계약 가운데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한 계약은 2724건으로 39.2%였다. 반대로 청구권을 사용하지 않고 임대인과 협의해 계약을 연장한 사례는 4232건으로 60.8%에 달했다.
계약갱신청구권은 세입자가 한 차례에 한해 기존 임대차계약을 2년 더 연장할 것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청구권을 행사하는 경우 임대료 인상률은 원칙적으로 5% 이내로 제한된다.
그러나 제도 시행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이미 청구권을 한 차례 사용한 세입자들이 다시 계약 만료 시점을 맞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전월세 매물이 충분하다면 다른 주택으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현재처럼 원하는 지역에서 적절한 조건의 매물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임대료가 오르더라도 기존 주택에 계속 거주하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
청구권 소진 후 재계약… 월세 95.8% 오른 사례도
실제 일부 서울 대단지에서는 재갱신 과정에서 월세가 큰 폭으로 오른 사례가 확인됐다.
송파구 헬리오시티 전용면적 84㎡의 한 계약은 2024년 9월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한 뒤 지난달 다시 갱신됐다.
보증금은 5억원으로 유지됐지만 월세는 166만원에서 325만원으로 상승했다. 인상률은 95.8%에 달한다.
강동구 롯데캐슬퍼스트 전용면적 133㎡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나타났다.
2024년 9월 보증금 3억원·월세 175만원으로 청구권을 사용해 계약을 연장했던 계약이 지난달 다시 갱신되면서 보증금은 그대로 유지된 반면 월세는 330만원으로 올랐다. 월세 기준 88.6% 상승한 것이다.
기존 임대료가 주변 시세보다 상당히 낮았던 경우 세입자 입장에서는 높은 인상률을 받아들이더라도 이사비와 중개보수, 새로운 주택을 찾는 부담 등을 고려해 현재 거주지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할 수 있다.
청구권 남아 있어도 사용하지 않는 세입자
반대로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도 집주인과 합의해 임대료를 올리고 계약을 연장한 사례도 나타났다.
관악구 신림2차푸르지오 전용면적 84.81㎡의 경우 2024년 8월 보증금 5000만원·월세 125만원으로 신규 계약이 이뤄진 뒤 지난달 갱신됐다.
보증금은 그대로 유지됐고 월세는 132만원으로 5.6% 상승했다. 해당 계약은 갱신청구권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신고됐다.
현재의 임대료 인상 폭을 감당할 수 있다면 청구권을 당장 사용하지 않고 남겨뒀다가 향후 전월세 시장이 더욱 불안해졌을 때 활용하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볼 수 있다.
전월세 매물 감소가 시장의 핵심 변수
전문가들은 최근 합의 갱신 증가의 배경에 전월세 매물 부족이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기존 세입자가 청구권을 이미 사용한 상황에서 주변 전월세 가격까지 상승하면 선택지는 좁아진다. 새로운 주택을 찾아 이동하는 것보다 집주인과 조건을 다시 협상해 기존 주택에 머무르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향후 세제와 주택 정책 변화 역시 임대차 시장의 변수가 될 전망이다.
고가 또는 비거주 주택에 대한 보유 부담 증가로 일부 집주인이 주택을 매각하거나 직접 거주하는 사례가 늘 경우 시장에 공급되는 전월세 물량이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신축 아파트 입주 물량 감소까지 겹치면 전월세 공급 부족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집주인의 보유 비용이 증가하는 상황에서는 전세를 보증부 월세로 전환하거나 보증금을 유지하는 대신 월세를 높이는 움직임이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결국 서울 임대차 시장에서 나타나는 ‘합의 갱신’ 증가는 단순히 계약 방식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입자들이 새로운 집을 선택하기보다 현재 거주지를 지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전월세 매물 부족과 주거비 상승 압력이 동시에 나타나는 신호로 해석된다.
특히 계약갱신청구권을 이미 사용한 세입자들의 재갱신 시기가 본격적으로 돌아오면서 향후 서울 전월세 시장에서 임대료 상승과 월세화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될지가 주요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