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로 빠르게 변하고 있는 북극에서 하나의 자연재해가 또 다른 재해를 불러오는 이른바 ‘연쇄재해’ 위험이 확인됐다.
독일 헬름홀츠 킬 해양연구센터(GEOMAR)와 노르웨이 지질조사국 등이 참여한 국제 연구진은 노르웨이령 얀마옌섬에서 발생한 규모 6.5 지진과 이후 나타난 암석사태·빙하 붕괴를 분석한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얀마옌섬은 그린란드 동쪽과 아이슬란드 북쪽 사이 북대서양에 자리 잡은 화산섬이다. 이곳에는 세계 최북단 활화산으로 알려진 베렌베르크가 있으며, 정상에서 해안 방향으로 여러 빙하가 형성돼 있다.
연구진에 따르면 지진 발생 직후 베렌베르크의 가파른 화산암 사면 일부가 무너졌다. 떨어져 나온 대량의 암석과 토사가 빙하 표면을 뒤덮으며 해안 인근까지 이동한 것으로 분석됐다.
인근 빙하에서는 지진 충격과 함께 빙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칼빙(calving)’ 현상도 관측됐다.
연구진은 지진 관측 자료와 고해상도 위성영상, 초저주파 자료, 기온 및 장기 기후 기록 등을 종합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그 결과 대규모 암석사태는 본진이 발생한 뒤 불과 수분 안에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지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대규모 붕괴
주목되는 부분은 연구진이 이번 사태의 원인을 단순히 지진 하나로만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얀마옌 일대는 본래 지진 활동이 존재하는 지역이지만 장기간의 위성 관측 자료에서는 이번과 비슷한 수준의 대규모 지진 유발 암석사태가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대신 대규모 붕괴가 발생하기 전부터 해당 산사면이 서서히 불안정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 발견됐다.
2019년부터 2024년 사이 붕괴 지역에서는 여러 차례 작은 규모의 암석 붕괴가 발생했다. 장기 기온 기록에서도 1990년대 후반 이후 이례적으로 더운 여름날이 증가하는 등 뚜렷한 온난화 경향이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러한 장기간의 기온 상승이 영구동토층의 안정성을 떨어뜨렸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영구동토층은 최소 2년 이상 계속 얼어 있는 토양이나 암반을 말한다. 특히 산악지역에서는 암석 틈에 얼어 있는 얼음이 일종의 접착제처럼 암반을 붙잡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온이 상승해 얼음이 녹으면 암석 사이의 결합력이 약해지고 균열이 확대되면서 산사면 전체의 안정성이 떨어질 수 있다.
결국 오랜 온난화로 취약해진 산사면에 강한 지진의 흔들림이 더해지면서 대규모 붕괴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연구진의 해석이다.
“지진은 기후변화 때문이 아니다”
이번 연구에서 특히 구분해야 할 부분도 있다.
지진 발생 자체를 기후변화의 결과로 볼 수는 없다. 지진은 지각 운동에 의해 발생하는 지질학적 현상이다.
그러나 기후변화가 영구동토층과 빙하, 산악지형의 안정성을 약화시킨다면 동일하거나 비슷한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과거보다 더 큰 산사태나 빙하 붕괴가 뒤따를 가능성은 높아질 수 있다.
즉 지진이 ‘방아쇠’라면 장기간의 온난화는 재해의 규모와 파급효과를 키우는 ‘증폭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나의 재해가 다음 재해 부르는 ‘연쇄재해’
이번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자연재해가 각각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면서 피해가 확대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지진이 산사면 붕괴를 일으키고, 무너진 암석이 빙하를 덮거나 충격을 주면서 또 다른 붕괴를 일으키는 식이다. 지역 조건에 따라서는 이후 토석류나 홍수, 해안지역 피해 등 추가 재난으로 연결될 가능성도 있다.
최근 네팔과 중국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재해 역시 발생 과정에는 차이가 있지만 암반과 빙하의 불안정성이 다른 재해와 결합하면서 피해가 확대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 연구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연구진은 두 사례가 동일한 재해는 아니지만 온난화와 영구동토층의 변화가 빙하와 산사면의 안정성을 떨어뜨리고 여러 자연재해가 연속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공통점에 주목했다.
기후위기 시대, ‘재해 하나’가 아닌 연결된 위험 봐야
이번 연구는 기후변화 시대의 재난 대응 방식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앞으로는 지진·산사태·빙하 붕괴·홍수 등을 각각 별개의 재난으로만 바라보기보다 하나의 사건이 다른 재난을 촉발할 가능성까지 포함한 ‘복합·연쇄재해’ 관점의 감시와 대응이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특히 온난화 속도가 빠른 북극과 고산지역에서는 영구동토층 해빙과 빙하 후퇴가 지형 안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장기간 관측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기후변화가 새로운 지진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자연의 위험 요소들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고, 하나의 충격이 더 큰 재난으로 번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이번 연구가 던지는 경고다.